
20여년간 담임하던 대구동신교회에서 물러난 권성수(71) 원로목사는 홀가분해 보였다. 권 목사는 최근 강원도 홍천에저 열린 교단 행사장에서 국민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지난달 은퇴식을 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감사다. 힘든 고비도 없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마치 제 옆에 따라다니시면서 도우신다는 느낌을 항상 받았다. 2000년부터 지난달까지 목회 기간 전체가 감격이었다”고 했다.
권 목사는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다 2000년 대구동신교회 담임으로 청빙 됐다. 그는 “마음에 부담이 있었다. 내가 너무 편하게 지내는 것 아닌가. 목회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5년간 기도했다”고 했다.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당시 여러 곳에서 청빙 요청이 있었는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구동신교회 청빙에 내 마음이 매이더라.(행 20:22) 대구동신교회가 선교에 열려 있는 거 같아 좋았다”고 했다.
그는 생명사역에 매진했다. “옥한흠 목사님은 예수님의 사역을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것(마 9:35)에서 찾았다. 나도 비슷한 본문(마 4:23)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생명사역을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생명사역의 틀로 제자훈련을 실시했다.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강조했다. 성도들의 변화를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위기도 여러 차례 있었다. 권 목사가 신학교 총장 후보가 된 적이 있다. “한 장로님이 교회를 버스에 비유하면서 ‘지금 버스가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데 기사가 내리면 어떻게 되겠냐’고 했다. 내가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그 말씀이 내게도 와 닿았다. 어려울 때마다 기도했다. ‘주님 제힘으로 못 넘어갑니다. 도와주세요’라고.”
그렇게 어려운 시기를 통과했다. 생명사역을 통해 성도 교역자 장로 모두 성장했고, 대구동신교회는 교회가 있는 만촌동을 섬기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주부들을 위한 문화대학, 어르신을 위한 경로대학도 운영했다. 성도들은 대구 전역에서 가가호호 전도하고 대구성시화 운동에 앞장섰다. 그가 부임했을 때 대구동신교회 출석 성도는 800명 정도였다. 지금은 10배가량 늘어났다.
하지만 상당수 교회가 고전하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십자가는 사양하면서 면류관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광이 아니라 고난이 먼저다. 교회나 교단, 연합단체에서 뭔가 잘못돼도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몇 명 없다. 그런 작은 것부터 안 되면 교회는 바로 서기 어렵다”고 조언했다.
권 목사는 후임 목사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이미 서울로 이사를 했다. 앞으로도 생명사역을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덧붙이고 싶은 말을 묻자 이런 말이 돌아왔다. “새로 오신 문대원 목사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다. ‘구관이 명관’ 같은 말은 하지 마시라. 또 내가 교회에 갔을 때 ‘목사님, 많이 늙으셨네요’라는 말은 안 했으면 좋겠다. 그런 말은 안 하는 게 낫다. 하하.”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46443